광고

[시사특집] 국가기념일 지정을 계기로 '부마항쟁'을 재조명 하다

김재순 기자 | 기사입력 2019/10/16 [13:29]

[시사특집] 국가기념일 지정을 계기로 '부마항쟁'을 재조명 하다

김재순 기자 | 입력 : 2019/10/16 [13:29]

▲ 부마항쟁 (사진=유튜브갈무리)     © 

 

1979년 10월 16일부터 닷새 간 박정희 유신독재에 반대해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부마민주항쟁이 40주기를 맞았다.

 

불혹의 시간이라 할 오랜 역사가 흐르면서 마침내 우리 정부는 지난 달 17일 국무회의를 통해 국가기념일로 지정하기에 이르렀다. 때문에 국가 기념일 지정으로부터는 처음으로 맞는 기념일인 셈이다.

 

부마항쟁은 사망, 연행, 구금 등 직접 관련자만 2천여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큰 사건이었음에도 그간 우리 근현대 역사에서 일정부분 외면받아왔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5.18 광주민주화항쟁의 그늘에 가리운 측면도 없지 않았다. 더욱이 정확한 진상 규명은 여전히 미흡한 실정이고, 국가가 인정한 관련자도 200여 명 정도에 불과하다.
 
국가기념일 지정을 계기로 부마항쟁을 재조명하고 관련자들에 대한 처우개선 등 국가의 고유한 책무를 다시금 생각케 하는 시간이 아닐 수 없다. 유신독재라고 하는 서슬퍼른 군사정권 아래 가장 암울했던 시대를 돌아본다는 것은 역사에서 교훈을 얻기 위함일 것이다.

 

▲ 부마항쟁 당시 (사진=ytn)     © 


두말할 것도 없이, 부마항쟁은 지난 1979년 10월 부산 및 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진 박정희(朴正熙)의 유신독재에 반대한, 반정부 시위사건이다.
 
1979년 5월 3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민주회복'의 기치를 든 김영삼(金泳三)이 총재로 당선된 후 정국은 여야격돌로 더욱 경색되었다. 이어 8월 11일 YH사건, 9월 8일 김영삼에 대한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 10월 4일 김영삼의 의원직 박탈 등 일련의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유신체제에 대한 야당과 국민의 불만이 크게 고조되고 있던 때였다.

 

그러한 가운데 10월 13일 신민당 의원 66명 전원이 사퇴서를 제출하였으나 공화당과 유정회 합동조정회의에서 '사퇴서 선별수리론'이 제기되면서 부산 및 마산 출신 국회의원들과 그 지역의 민심은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김영삼의 정치적 본거지인 부산에서는 10월 15일 부산대학에서 민주선언문이 배포되고, 16일 5,000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를 주도, 시민들이 합세하여 대규모 반정부시위로 이어졌다. 시위대는 16일과 17일 이틀 동안 정치탄압 중단과 유신정권 타도 등을 외치며 파출소·경찰서·도청·세무서·방송국 등을 파괴하였고, 18일과 19일에는 마산 및 창원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됐다.

 

정부에 의해 18일 0시에는 부산  전지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시가지에 전차가 활보하기 시작했다. 계엄군은 시민 1058명을 연행,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다. 20일 정오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衛戍令)을 발동하고 군을 출동시켜 505명을 연행하고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비록 시위는 진정되었으나, 그걸로 민주화의 열망을 꺾을 수는 없었다. 이후 불과 엿새 뒤인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가 사망함으로써 유신체제의 종말을 앞당긴 계기가 되었다. 이것이 부마항쟁의 대략이다.

 

하지만 이들이 보여준 독재에 대한 항거의 정신, 민주화를 향한 봉기는 이후 우리의 민주화과정에 그대로 투영되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대안신당 장정숙 대변인은 "정부는 부마항쟁을 비롯, 부정한 권력에 의해 희생당한 이들을 확인하고 보상하는 일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면서 "국가를 위한 소중한 희생이 쉽게 잊혀져서는 안 될 것이다. 이는 가해자들에 대한 단호한 처벌만큼 중요한 일이다"고 밝혔다.
 

  • 도배방지 이미지

관련기사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