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코리아=고승주기자] 중고생이 머리카락을 기르면 불량하다. 가슴 큰 금발여성은 멍청하다. 지방사람들은 목소리가 크다. 공대생은 사회성이 없다. 편견과 고정관념은 대부분 불쾌한 상식선에서 끝난다. 하지만 이것이 사회를 운영하는 시스템에 섞여 들어가면 이는 차별과 불공정을 낳는다. 성폭행 피해여성 자살 사건이 조명하는 것은 법정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얽힌 폐해일지도 모른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했을 뿐…누군들 좋아서 하나 헤픈 여자가 돈 때문에 착실한 회사원 끌어 들였나 지난 6월 1일. 서울 구로구 오류동의 한 호텔에서 수면제 몇 알과 빈 맥주캔, 빼곡한 글씨로 채워진 편지지 4장이 변 모씨(29·여)의 싸늘한 시체가 발견됐다. 자살한 변씨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건너 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한국으로 왔지만 학교를 다니지 못한 젊은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져 있었다. 노래방 도우미도 그 중 하나였다. 노래방 도우미 일은 변씨에게 돈을 주었지만, 또한 많은 것을 빼앗아 가기도 했다. 8년 전 상대남성에게 성폭행 당하면서 변씨는 인생의 혹독함을 몸소 치러야 했다. 하지만 노래방 도우미 일은 끝까지 변씨의 발목을 잡았다. 지난 1월 1일. 변씨는 인터넷 채팅으로 만난 중국인 어학 연수생 진모(24)씨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며 경찰에 신고했다. 검찰은 진씨는 2월 1일 구속기소했고 서울중앙지법에서 진씨에 대한 공판이 열렸다. 공판이 모멸감과 굴욕감 줬나 자신의 분과 한을 풀어줄 줄 알았던 공판은 도리어 모멸감과 굴욕감만 남겼다. 진씨측은 해당 사건에 대해 합의에 의한 관계임을 주장했다. 지난 달 30일 공판에서 진씨의 변호인은 진씨와 변씨가 2차례의 인터넷 채팅을 통해 서로 아는 사이였으며, 성폭행이 벌어진 장소가 변씨의 고시원이었던 점을 들어 일방적인 성폭행은 아닐 수 있다고 변론했다. 그러면서 변호인은 변씨가 8년전 노래방 도우미로 일하면서 손님을 성폭행 혐의로 고소, 합의금을 받고 취하한 일을 거론하기도 했다. 공판이 끝난 후 변씨는 억울함을 편지지 6장에 적었다. 2장은 자택에서 4장은 자살한 호텔에 발견됐다. 변씨는 유서에 “판사가 나를 성폭행한 상대를 두둔하고 합의를 종용했다. 수치스럽고 억울하다. 판사가 내게 ‘중학교도 못 나오고 노래방 도우미도 하며 험하게 살아왔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내 말을 믿지 않았다. 가정형편이 어려웠고 많이 배우지 못했지만 함부로 거짓말을 하거나 남의 것을 탐하는 사람은 절대 아니다”라며 분을 토로했다. 뿐만 아니라 변씨는 “재판부가 가해자는 젊고 회사를 다니는 착한 사람이고 자신은 중학교도 못 나오고 헤프며 돈 때문에 억울한 사람의 인생을 망친 것처럼 표현했다”고 전했다. 재판부는 변호인의 신문이 끝나자 “피고인(진씨)이 어학연수생이고 합의금을 공탁하겠다고 하는데 합의하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변씨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돈 받고 없는 셈 치자는 말이기 때문이다. 변씨는 “그동안 열심히 일해 돈을 많이 모아 돈은 필요하지 않다. 날 믿지도 않으면서 왜 법정에 나오라고 한 것이냐. 노래방을 다니는 사람이면 강간을 당했어도 유혹한 게 되는가”라며 울분을 터트렸다. 또 변씨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법정에 다녀온 뒤 여러 사람 앞에 벌거벗고 있는 것 같았다”고 고통을 토로했다. 변씨는 “성폭행을 당한 뒤 죽고 싶을 때가 많았지만 살아보려고 간신히 버텨왔다”며 “이제는 내가 죽어야 내 말을 들어줄 것 같다”고 전했다. 가슴 아픈 사연의 끝은 자살해서 미안하다라든가 상대 남성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변씨는 죽어서도 자신을 믿어 주지 않았던 재판부의 무성의함을 잊을 수 없었다. 변씨는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 법적 대응을 해달라”라고 끝맺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재판과정 모욕 진짜 있었나 “얼마나 억울했으면 자기 죽음으로 이걸 밝히고 싶다고 했겠습니까. 어차피 죽었지만 한이라도 (풀어주고) 진짜 진실을 밝히는 게 저의 바람입니다.” 유가족은 해당 재판부를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하고 대법원에 탄원서를 냈다. 동시에 검찰에 재판 기록을 공개해줄 것을 요구했다. 재판부는 난감하기 그지없는 모습이다. 아직 사건이 마무리된 것이 아니라 자료를 공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법원 관계자는 “(신문(訊問)과정에서) 모욕적 발언도, 합의 종용도 없었다”면서 “강간인지 합의에 의한 성관계인지를 다투는 사건이어서 사실 관계를 확인하는 질문이 오간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지만 사회 각층에서는 규탄을 멈추고 있지 않다. 재판부도 할 말은 있다. 비록 진씨가 가해자이긴 하지만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입증과정에서 진씨를 유죄로 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아무리 극악무도한 죄인이라고 해도 지은 죄과 이상의 벌을 줄 수는 없다. 이는 형사법의 대원칙이다. 또한 피해자는 가해자가 최대한 많은 벌을 받게 하고 싶기 때문에 과장된 증언을 할 수 있다. 따라서 변씨가 원했던 것처럼 피해자의 말을 전부 믿을 수도 없다. 변씨의 진술이 일관성이 있는지, 혹 거짓이나 과장된 증언은 없는지 꼼꼼히 검토한다. 그 과정에서 변씨에게 불편한 사실들도 꺼내 놓을 수 밖에 없으며, 돈을 노린 거짓 고발일 가능성도 검토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원칙들은 고스란히 원고인 변씨에게도 통용된다. 만일 재판부가 ‘중학교도 못 나온 헤픈 여자가 돈 때문에 착실한 회사인을 끌어 들여 인생을 망쳤다’는 식의 뉘앙스로 표현했다면 이는 재판부 스스로 신성한 법정을 모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1988년 12월 5일 벌어진 대구 강정순 사건은 선입견으로 인해 사법부가 공정성을 포기한 대표적 사건이다. 대구 대현동 파출소에서 김정부 경장과 박승근 순경은 다방 여종업원이었던 강정순씨를 윤간, 성병까지 옮겼다. 피해자 강씨가 고소하자 가해 경찰 2명은 피해자를 돈을 노린 꽃뱀사건이라며 맞고소를 했다. 문제는 검찰이 상대가 다방 여종업원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가해자를 도와 증거은폐 및 조작을 했다는 것이다. 검찰은 피해자를 간통죄와 무고죄로 구속까지 했다. 결국 무죄로 풀려났지만, 가해자인 두 경찰은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만일 피해자가 부유층이나 권력층 사람이었다면 결과는 180도 달라졌을 것이다. 판사가 입는 법복의 검은 색은 그 어떤 색으로도 물들여지지 않는 색으로 법의 공정성을 상징한다. 따라서 법정에 서는 순간 성매매 여성이건, 대기업 총수의 딸이건 간에 사람이란 이름을 빼면 모두 같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의 사법부는 33년 전과 다를 바가 없다. 고승주 기자 gandhi55@sisakorea.kr <저작권자 ⓒ 시사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노래방, 노래방 도우미, 도우미, 성폭행, 성폭행 자살, 성폭행 피해여성 자살 관련기사목록
|
많이 본 기사
단신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