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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독트린'은 대박 - 오늘 朴대통령 네덜란드·독일 방문 위해 출국

맹인섭 기자 | 기사입력 2014/03/23 [06:06]

'통일 독트린'은 대박 - 오늘 朴대통령 네덜란드·독일 방문 위해 출국

맹인섭 기자 | 입력 : 2014/03/23 [06:06]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이후 7번째로 오늘(23일) 6박7일간의 네덜란드·독일 방문길에 오른다.
 
지난 1월 중순 인도와 스위스 국빈방문에 이어 올해로는 두 번째 해외 방문이다.

오전 대통령 전용기를 통해 출국하는 박 대통령은 오는 25일까지 제3차 핵안보정상회의 참석차 네덜란드를, 이어 25~28일에는 독일을 국빈방문할 예정이다.

24~25일에 박 대통령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핵안보정상회의에 참석해 전 세계 핵테러 위협 감소를 위해 국제사회가 그간 이뤄온 성과를 점검하고 핵안보를 지속적으로 강화해나가기 위한 국제적 협력방안을 논의한다.

24일 오후부터 열리는 회의 개회식에서 전임 의장국 정상 자격으로 현 의장국인 네덜란드의 마크 루터 총리 및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함께 선도연설에 나설 예정이다.

25일에는 오후까지 진행되는 토의에 참여해 핵안보분야에 대한 우리 정부의 기여와 공약을 발표하고 핵안보정상회의의 미래에 관한 의견을 각국 정상들과 교환한다. 이날 오후에는 반 총장과 양자회담을 갖고 우리나라와 유엔 간 주요 현안 및 한반도 정세 등에 관해 의견을 나눈다.

25일 오후 베를린에 도착한 뒤 26일부터 국빈방문 공식일정을 갖는다.
 
특히 독일정부는 이례적으로 통상 연중 4회에 한해 국빈을 초청해온 독일은 올해 국빈 접수계획이 마무리된 상황이었지만 박 대통령을 국빈으로 초청했다.

독일 일정으로는, 26일 대통령궁에서 공식환영식에 참여한 뒤 가욱 대통령과 회담을 갖고 대통령 주최 국빈오찬을, 오후에는 클라우스 보베라이트 베를린 시장과 함께 독일 통일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문을 시찰하고 베를린 시청을 방문한다.

이어 '닮은 꼴' 여성 지도자인 메르켈 총리와 정상회담 및 만찬을 갖고, 27일에는 통일독일 첫 외교장관인 한스 디트리히 겐셔 전 서독 외교장관과 전 서독 내무장관인 볼프강 쇼이블레 재무장관 등 독일 통일과 통합의 주역들을 접견하고 독일의 경험과 한반도 통일에 대한 조언을 듣는다.

이후 박 대통령은 지그마 가브리엘 독일연방 부총리 겸 경제에너지부 장관 점견 및 한·독 경제인 오찬 등의 일정을 이어간다.

박 대통령은 베를린 일정을 마친 뒤 역대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옛 동독지역인 드레스덴을 방문한다. 작센주 주도인 드레스덴에서는 주정부 청사를 방문해 스타니슬라프 루디 틸리히 주총리를 접견하고 주총리 주최 만찬에 참석한다.

독일 일정 마지막 날인 28일에는 옛 동독지역의 대표적 종합대학이자 독일 5대 명문 공대 중 하나인 드레스덴공대를 방문해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연설에 나설 예정이다.

박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올 초부터 자신이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통일대박론에 방점을 찍는 '통일 독트린'을 내놓을 것이란 전망이서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나의 방독소감(訪獨所感) 
 -‘붕정칠만리, 박정희 대통령 방독기’(동아출판사·1965)
 
육영수(박정희 대통령 부인)

◇로렐라이의 전설을 꿈꾸며

금번 대통령과 나의 서독방문을 전후하여 국민학교 어린 학생들의 귀여운 축하편지로부터 80 노인의 정중한 격려편지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에서 보내주신 많은 서신과, 또한 이름을 밝히지 않고 전화나 전보로 우리의 7만리 여로가 무사함을 빌어주시고, 바람이 찬 가두에까지 나와서 환송·환영해주시는 등 많은 성원을 보내주신 국민여러분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할지 모르겠다.

국가의 중책을 맡은 분의 아내가 된 입장에서 갖는 여행이란 결코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독일하면 먼저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하늘이 안 보이는 라인의 공장지대나 루르의 탄광지대가 아니라, 소녀시절부터 즐겨 읽은 하이네의 시 속에 곱게 흐르는 라인강이며, 고풍이 창연한 성벽과 신비로운 사원들, 낭만과 전설 속에 고요히 라인강을 굽어본다는 로렐라이 절벽, 이런 것들이었고, 또 이런 것들을 실제로 답사해보고 싶다는 바람이 간절했다.

더구나 떠나기 전 우리 아이들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는 무리를 해서라도 꼭 명승지를 찾아봐야겠다는 혼자만의 속셈을 가지고 있었지만, 철두철미하게 짜인 일정표의 진행은 두 번 다시 마음도 못 먹게끔 나를 붙들어 맸다.

“이번에 어머니는 먼 독일까지 여행을 가지만, 아마도 여러 가지 사정과 또 내가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너희들에게 선물을 사다주지 않을 거야. 물론 너희들에게 좋은 선물을 사다주면 좋긴 하겠지만, 어머니의 입장에선 여러 면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사정이 있기 때문이니, 내 마음을 이해해주고 이번 여행에 선물을 기대하지 마라.”

나의 간곡한 타이름에 선선히 응해 준 우리 세 꼬마들에게 대신 흥미진진한 로렐라이의 전설이라든지 기타 이야깃거리들을 잔뜩 안겨주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나는 그러한 여행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해 아이들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지만, 그곳 대통령부처께서 다행히도 세심하게 보내주신 꼬마들의 선물로써 면목을 그럭저럭 세운 셈은 되었다.

어쨌든 나 개인으로서는 자유롭게 독일 사람들의 생활 속에 실제로 파묻혀보고 싶었던 것도, 또 시간의 제한 없이 관광지를 둘러보고 싶었던 뜻도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나의 입장이 결코 개인의 위치로 해석될 것이 못 된다는 자각으로써 스스로 위로를 하곤 했다.

◇가슴 뭉클한 애국가

1964년 12월7일 8시5분 부슬비가 비행장의 아스팔트를 촉촉이 적시는 가운데 손에 태극기를 들고 우리를 환영 나온 교포들의 따뜻함을 제일 먼저 느끼며,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내려 그곳 인사들의 마중을 받았다.

29시간의 긴 비행에서 오는 피로를 감추며, 검정 평복차림의 대통령과 황금색 한복차림을 한 나의 웃음이 이역만리 먼 곳에 사는 우리 교포들에게 좀 더 따뜻하게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했다. 김포공항의 몇 배가 되어 보이는 이 공항은 독일에서도 가장 중요한 항로의 요지라는 것과, 매 2분마다 뜨는 비행기에 오르내리는 관광객들의 수효가 놀라운 숫자를 나타낸다하니 이것만으로도 잘 정리된 살기 좋은 나라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일기는 점차로 개어 저공비행을 하고 있는 기상에서 높은 산과, 그리고 질서 정연히 뻗어있는 건물들이 그림같이 아름답게 내려다보이더니, 같은 날 9시40분, 이 나라의 임시 수도 본(Bonn) 비행장에 도착했다. 공항에서는 독일연방공화국 대통령부처를 비롯하여 에르하르트 수상, 기타 많은 인사들에 의해 환영식이 거행되었고, 이역만리에서 그 나라 군악대에 의해 연주되는 애국가는 새삼스럽게 나의 가슴을 뭉클하게 해주었다.

◇흑의민족(黑衣民族)

백발의 노구가 조금도 힘에 겨워 보이지 않는 대통령과, 처음부터 친절과 다정함으로 동방의 손님을 따뜻이 맞이해주는 대통령부인에게서 나는 마치 오래 사귄 친구를 대하는 듯한 친근감마저 느꼈다.

그 부인은 지금도 본 대학의 러시아과에서 젊은 학생들과 함께 현대문학 및 러시아어를 연구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그 열의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그분은 현재도 5~6개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을 백의민족이라고 한다면, 독일인을 가리켜 흑의민족이라 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들은 의식에나 행사에는 예복처럼 검은 옷을 즐겨 입는다더니, 과연 남녀 모두 검은 복장을 단정히 입고 있거나, 아니면 대부분 화려한 색을 피하고 검은 계통의 옷이나 또는 유니폼을 입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러시아워가 지난 길거리엔 다니는 사람들이 드물어 말로만 듣던 그 나라 국민의 검소·질박한 생활 태도와 안정된 사회생활질서를 한꺼번에 느끼게 해주었다.

특히 대통령 부인의 꾸밈없는 태도와 복장은 독일여성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우선 한 눈으로 그 나라 여성의 건전성을 보는 것 같았다. 따라서 나 자신의 몸가짐과 태도의 중요성이 다시 한 번 마음속에 느껴지는 것이었다.

오후에 우리나라 대사관에서 대사부인의 각별한 성의로 준비된 한식을 대했을 때는 얼마나 반갑고 고마웠는지!

높다란 건물 틈에 끼어 그래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기운차게 펄럭이고 있는 태극기 밑에 우리 대사관이 점잖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이 우리나라를 대표하고 국위를 선양하는 중심점이 되고 있다 생각하니, 어쩐지 믿음직스럽고 대견한 반면, 남의 나라 공관 못지않게 잘 가꾸고 꾸며져야 되겠다는 또 하나의 책임감이 느껴졌다.

그날 밤 늦게 그곳 대통령부처의 비공식 만찬 초청에서 돌아와 비로소 이제는 쉴 수 있다는 즐거움을 느꼈다. 동시에 다음날의 계획표를 검토하고, 또 앞으로 만날 사람들에 대한 예비지식을 갖기 위해 머리를 정돈하며 참고자료 등을 들춰보았다.

◇실리적인 생활

호텔에서 독일 사람들이 지극히 절약하면서도, 반면에 편리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얼마나 머리를 쓰고 있는지를 실감나게 해주는 것을 많이 느꼈다. 예컨대 세면실에서 느낀 것이 있다. 우리가 독일에 있을 동안 머물렀던 각 호텔들은 세계 각국에서 모여 오는 원수들을 접대하는 곳이어서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여 여러 가지 사치한 특수디자인을 해 놓았으리라는 상상을 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그들이 얼마나 실질적으로 쇠붙이 하나하나까지 적절하게 이용하고 있는지를 절실히 느낄 수 있게끔 섬세하게 꾸며진 시설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욕실 한가운데로 삥 둘러 멋지게 둘러진 굵은 철선이 처음엔 단순히 수건걸이에 지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것 자체가 스팀 시설을 겸하고 있었다. 또한 세면실에 손을 뻗으면 금방 닿을 수 있는 곳에 전화, 벨 장치가 되어 있었다. 전등 하나, 쇠붙이 하나를 아끼고 쓸데없이 낭비하지 않으면서도, 필수품은 적재적소에 놓는 등 독일인들은 정말로 문명의 이기를 최대한으로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2월8일 다음날 대통령 관저를 공식방문, 대통령 부처에게 우리나라 측에서 주는 훈장수여와 우리가 그 나라로부터 훈장을 받는 의식이 거행되었고, 또 선물 교환과 환담이 있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가지가지의 꽃들로 소담스럽게 꽃꽂이를 해 놓았는데, 우아하고 청초한 맛과 줄기의 선을 살려서 꽂는 우리의 꽃꽂이와는 달리 오브제를 사용치 않고 순전히 꽃 자체로써 담뿍 꽂아 무척 탐스럽고 화려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본 시청과 쾰른 시청은 원래 옛날 궁전으로 쓰이던 곳들이어서 그 규모라든가 실내의 조각들이 웅장하면서도 섬세했다. 일반 시민 상대의 관청이라기보다는 옛 왕조 때의 위풍이 아직껏 풍기는 듯한 위압감을 받았지만, 이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제도 하나하나가 시민들의 복리를 위해 헌신적으로 처리되고 있다는 것은 건물의 면모와는 상반되는 것이어서 마음이 기뻤다.

더구나 청사 내부의 곱게 다듬어 놓은 정성이 보이는 듯한 가지각색의 카네이션 꽃들은 모두 향기롭고 탐스러워 이 안에 발을 들여 놓는 사람의 마음을 황홀하게 해 주는 것 같았다. 두 도시의 시장부처들의 겸손하고 부드러운 환대는 꽃의 매력 못지않게 찾는 사람의 마음에 깊이 남는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우리 일행이 탄 차가 시가를 지날 때 우리를 알아본 시민들은 누구나 정중히 모자를 벗고 예의를 표하거나, 또는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렇게 오고가는 개개인 모두의 행동이 꾸밈없고 가식 없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 같아 예절바른 국민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방문한 쾰른의 돔(대성당)은 전통있고 유명한 곳으로 지금부터 약 600년 전에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 동안 많은 전란을 겪으면서도 신자들의 끊임없는 봉헌으로 매번 증축 수리를 할 수 있었기에 지금까지도 위풍당당하고 엄숙한 면모를 지니고 우뚝 서 있었다.

옛날 유럽에서 제왕이 되려면 누구든지 먼저 이 대성당에 와서 제왕이 된다는 예를 올려야 했다고 한다. 이 유서 깊은 대성당의 책임을 맡고 있는 대주교가 우리 일행을 맞이해주고 또 우리를 위해 경건히 기도해주었다.

그날 저녁 공식 만찬이 끝난 후, 독일대통령부처와 함께 유명한 베토벤할레에 가서 기대하던 모차르트의 교향곡 제38번 ‘The Prague’, 일명 ‘메뉴엣도 없이’를 들었다. 이 곡은 전체적으로 모차르트의 인간적인 주관성이 강한 곡으로 이름이 높다하며, 끝없이 흐르는 풍부한 악상이 한없이 맑고 깨끗한 흐름을 이루어 나아가 그 위에 화려한 꽃송이와 그 향기가 피어나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곡이다.

곡을 들으며 매번 유명한 음악인들의 방한공연이 있을 때마다 시민회관을 꽉 채우며 성황을 이루는 우리 한국의 음악팬들 생각이 간절해졌다. 또 요즈음 모차르트의 소나타를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 우리 아이들의 생각도 떠올랐다.

12월9일 지난밤 황홀하게 넘쳐흐르던 음악의 멜로디가 아직껏 그 여운으로 남아 어느 구석엔가 배어있을 것만 같은 그 베토벤할레에서 이곳에 와 있는 우리나라 유학생들과 조찬을 가졌다. 짧은 시간의 만남이었지만 나는 이 시간을 통하여 고국을 떠나와서 여러 가지 환경이 남들보다 더 공부를 해야만 대결이 될 수 있는 입장에 있는 우리 학생들과 대면했다. 이들과 되도록이면 친해지고 싶었고, 또 가까워져야 할 것 같았으며, 일일이 따뜻한 정을 나눠주고 헤어져야 되겠는데, 제한된 시간이 자꾸자꾸 지나가는 것이 몹시 초조하고 안타까웠다.

대통령께서 그곳 국회에 참석하시는 동안 나는 본 시내에 있는 여자실업학교와 마리아 임 발데 고아원을 방문했다. 독일 국민의 우수성은 이미 아는 사실이지만, 그들은 매사에 철두철미하고 정확하며 완전하다는 것을 알았다.

◇여자실업학교를 찾아

내가 방문한 이 실업학교는 일반 국민학교 졸업생 중 가정 사정으로 진학이 어려운 학생들이 다니는 곳이라는데, 현대식 건물에 완전한 시설이 갖춰져 있었으며, 각 반이 불과 20여명씩으로 짜여져 실제로 기술 습득에 열중하고 있었다.

1년 과정과 2년 과정으로 나뉘어있는데 일반 중학에서 배우는 교양과정을 반드시 이수시킨 후 전문기술을 가르친다고 한다. ‘요리반’, ‘재봉반’, ‘꽃꽂이반’, ‘육아반’, 그밖에도 약 10여 가지 분야로 나뉘어져 있으며, 이 학교에서 철저한 교육과 훈련을 받고 졸업하면, 대부분 직업을 갖게 된다. 특히 보모학을 전공한 졸업자는 이 학교 부속 탁아소 및 유치원에 남게 된다고 한다.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충실히 갖춰진 환경에서 용두사미 격이 되지 않는 철저한 교육을 실시하는 여자실업학교의 분위기는 서로가 개인지도를 주고받는 것 같았으며, 또 명랑하고 활발한 움직임은 어느 아늑한 살롱을 연상시켜주었다.

어쨌든 적당히 슬슬 넘긴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 이 사회에선 배우는 사람이나 가르치는 사람이나 모두가 한결같이 자기 전문분야에서는 완전무결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것 같아 부럽기 짝이 없다.

우수한 두뇌를 자랑하는 우리나라 학생들도 이만한 조건하에서 열심히 노력한다면, 그들보다 못하란 법은 없지 않겠는가?

◇마리아 임 발데 고아원

다음은 본시에 있는 마리아 임 발데 고아원에 갔는데, 주위 환경도 아름다웠지만, 그 속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명랑한 웃음소리는 현관에 발을 들여놓는 방문객을 기쁘게 하는 첫 인사처럼 들렸다.

귀국 후 나는 어느 친지에게 다음과 같은 독일 고아원 방문소감을 써서 보낸 일이 있다.

“아이들이란 비록 남루한 옷을 입혀도 귀엽게 길러야만 귀여운 법이고, 천하게 기르면 아무리 좋은 옷으로 단장을 해도 그 인상부터가 천하게 보이기 마련인가 봅니다. 내가 독일 고아원에 갔을 때, 그 아이들의 맑은 웃음과 눈동자는 조금도 낯선 방문객을 경계하는 것 같지 않았으며, 내 품에 안겼던 어떤 꼬마는 떠나올 때 내리려 하지 않아서 정말 발걸음이 돌아서질 않았습니다. 사리사욕을 떠나 오직 신에 영광을 돌리기 위해 봉사하는 수녀님들의 티없는 표정과 우정과 자비심 속에서 곱게 자라는 그 아이들의 가슴 속에도 그 뜻이 심어질 것이라 생각하니 무척 흐뭇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전란 속에서 생겨진 무수한 고아들의 양육문제는 심각한 사회문제입니다. 이곳 우리나라에서도 내가 고아원을 방문할 때마다 늘 느끼는 일입니다만 진정 자신을 초월하고 구원받아야 할 인명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우리의 가슴을 뜨겁고 감명 깊게 해주는지 모릅니다!”

아름다운 저녁노을이 곱게 이 고아원의 숲을 누빌 때 이들과 작별하며, 나는 진심으로 이 고아들의 앞날에 행운이 있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그리고 또 하나 감명 깊었던 것은 몸이 불편한데도 불구하고 나를 반갑게 영접해 준 에르하르트 수상부인의 인상이다. 수상부인은 요즈음 건강치 못하다는 소리를 들었기에 혹시 만나기 어려울지 모른다는 막연한 아쉬움이 있었는데, 고맙게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사양치 않은 그 부인의 친절에 나는 정말 기쁨을 금치 못했다.

◇걷잡을 수 없는 눈물

12월10일 고대하던 우리의 광부들과 간호학생들을 만나는 날이었다. 고되 노동에 시달리는 그들에게 좀 더 따뜻한 손길과 부드러운 웃음을, 포근한 인정을 나누어 줘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독일에서도 유명한 아우토반을 달리면서도 그 아름다운 경치에 흠뻑 도취되지 못했을 만큼 나의 머릿속엔 우리 동포인 많은 광부들과 만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라가 부강하여 기운 있는 젊은이들의 노동력을 먼 나라에까지 보내지 않고도 우리나라에서 흡수할 수 있고, 그들을 편안히 살게 해 줄 수 있는 나라를 구름위에 집을 짓듯이 머릿속에 수없이 그려보는 여자다운 감상에 얼마간 젖어 들다보니 차는 어느 덧 루르지방의 탄광단지에 들어서고 있었다.

도로 연변으로 우뚝우뚝 서 있는 굴뚝과 검은 연기 밑에 묵직하게 늘어 선 많은 공장들이 얼마나 길고 넓게 퍼져있는지, 이것이 말로만 듣던 그 공장지대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명한 정유공장인 이곳 회사의 기술과 자재로 우리 한국 울산에도 정유공장이 세워졌다는데, 그것은 이 규모의 몇 분의 일이나 되는 공장일까? 또 그 공장이 세워짐으로써 얼마만한 혜택이 우리 국민들에게 베풀어질 것인가를 머릿속에 헤아려보는 가운데 광부촌에 도착했다.

그러나 웃음을 주고 위로를 주겠다고 그렇게도 마음속으로 단단히 생각했던 나의 계획은 엉뚱하게도 그들을 대하는 순간, 검은 눈동자와 황색 피부의 낯익은 우리 젊은이들의 환성 속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아프도록 가슴이 맺혀 오는 무엇인가 뭉클한 감정이 솟아오르며 시야가 뽀얗게 흐려지는 것이었다.

분별없이 마구 흘러내리는 눈물을 들킬세라 참고 또 참았으나 걷잡을 수 없는 격정은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소리를 핑계 삼아 나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흐느끼게 하고 말았다. 그곳에 모인 간호학생들을 눈이 벌겋게 울렸고, 또 모든 사람의 가슴을 두드린 그 순간을 나는 지금도, 또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숙소를 돌아보고 광산시찰을 마치고 돌아오며, 나는 속으로 수없이 중얼거렸다.

“지금 몸은 비록 여러분 곁을 떠나지만, 마음만은 항상 여기에 남아서 여러분을 따뜻이 보살피고 위로하며 격려하고 싶습니다.”

한국과 독일, 그리고 먼 나라에까지 와서 일해야 하는 우리 젊은이들, 본국의 수없이 많은 실업자와 영세민들, 우리가 기필코 이루어놓기 위해 해야만 할 무수한 과제들, 이러한 모든 것이 거미줄처럼 머릿속에 엉켜 그날 하루는 착잡한 심정 속에서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오후 베스트팔렌 주지사의 성의 어린 오찬 대접을 받고, 그분들의 정중하고 따뜻한 영접을 감사하게 생각했다.

◇독일의 판문점, 베를린 장벽

12월11일 (베를린에서) 세계의 이목을 끄는 베를린. 이곳의 시장은 독일의 야당 당수인 브란트씨.

때마침 어둠이 내려 덮이는 때여서 비행기 안에서는 동서베를린을 분별키 어려울 줄 알았다. 그러나 수행원의 안내로 창밖을 내려다보았더니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불빛에 덮인 서베를린과 그렇지 못한 동베를린이 한 눈에 구별되는 뚜렷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날 저녁엔 브란트 시장부처가 베풀어준 만찬회가 있었다. 베를린 장벽을 통한 허다한 비극을 실제로 보아온 시장부부였지만, 상냥함과 따뜻한 표정으로 많은 시민들의 가슴을 포근히 어루만졌을 것이라고 느껴졌다.

다음날 아침 우리 일행은 관광버스를 타고 베를린 장벽을 보러 나갔다. 도시를 일직선으로 구분한 것이 아니라, 꾸불꾸불 꾸부러진 경계의 주위엔 얼마 전에 헐었다는 건물들이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었다. 쌓여있기도 하고 틈이 있는 데마다 뒹굴듯이 쳐놓은 가시철조망은 자유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제지하기 위한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초소마다 삼엄하게 서 있는 경비원들은 자유를 찾아 넘어오는 사람들에게 사정없이 발포한다는 것이었다.

전망대 위에서 멀리 동베를린을 넘어다보며 나는 우리 한국의 판문점을 생각했다. 내가 꼭 한 번 가보기를 원하고 있었으나, 현재 나의 위치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규칙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곳에도 이러한 전망대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으며, 거기에서 멀리 개성 쪽으로 향하는 곳에 하얀 다리가 놓여있는데, 이 다리를 가리켜 그곳에 주둔하는 유엔군들이 ‘돌아오지 않는 다리(Bridge of No Return)’라고 이름 지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다리를 건너서 살아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의미를 포함해서 붙인 이름이라니 얼마나 가슴을 쓸쓸하게 해 주는 말이며, 그 다리 건너에 있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애착을 갖게 해 주는 말인지 모른다. 나는 이러한 것을 생각하면서 지난날 신문지상을 통해 이 베를린 장벽을 넘어오던 무수한 사람들이 당한 갖가지 참상이 실제 눈에 보이는 듯하여 여자다운 울적함에 젖었다.

그 옛날 하이네·릴케·괴테의 시 속이나, 모차르트·베토벤의 음악 속에는 이런 비극은 있지 않았다. 무한히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인간들의 숨결과 그러한 인간만이 지니는 깨끗한 번뇌와 고달픔은 있었을지언정, 항상 아름다운 기풍이 흐르던 독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산세력은 인간의 한없이 평화로운 고장에, 생활에, 이토록 무거운 장벽을 드리움으로써 씻지 못할 오점을 남겨놓았다는 느낌을 가졌다. 또한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 쪽으로 향해있는 건물의 유리창과 브란덴부르크 문까지 모두 굳게 닫히고, 또 보이지 않도록 막아놓은 것을 실제로 보면서 분단된 세기의 비극을 한꺼번에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독국민들이 장벽이 막히기 전에 브란덴부르크 문의 형상을 딴 기념핀을 만들어 그것을 꽂고 또 관광객들에게도 기념으로 팔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들이 얼마나 통일을 갈망하고 있는가를 느낄 수 있었다. 포츠담광장에서 장벽 너머로 동베를린을 내려다보며 느낀 여러 가지 가슴 아픈 일들은 나의 뇌리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기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나는 베를린 장벽을 떠나며 한독 양국이 함께 처하고 있는 이 비극에서 하루 속히 벗어나야함을 절실히 느끼고, 두 나라가 공동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좀 더 적극적으로 합심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뮌헨의 인상

12월12일 뮌헨은 바이에른주의 수도격이며, 신구(新舊)시대의 문명을 함께 보존하고 있는 역사 깊은 도시이고, 또 현대의 중요한 예술도시이다.

이 바이에른주 사람들은 지금도 옛날 조상들의 문화, 풍속 및 습관을 철저히 지키는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들었다. 그러면서도 북부사람들보다 더 쾌활하고 명랑한 성격을 지닌 사람들이기도 하다.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을 계획한 것이 바로 이 도시였다고 한다. 우리에게 오찬 대접을 해 준 바이에른 주지사부부는 대단히 인상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분들이었다.

우리 일행이 뮌헨에 도착한 날 저녁, 그곳에 유학하고 있는 한국학생들 주최로 한국 춤, 민요, 가야금까지 동원된 다채로운 프로가 있었다. 외국학생 틈에서 남의 나라 말로 공부하기에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없을 텐데 우리를 위해 준비하느라고 얼마나 애를 썼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고맙다못해 측은하도록 그 성의가 마음에 젖어들었다. 이렇게 귀한 자리에 대통령께서 부득이한 사정으로 참석치 못하신 것이 못내 애석했다.

쯔빙거 궁전에 들렀을 때 천정과 벽이 온통 벽화로 화려하게 그려져 있었는데, 몇 백년 전의 색채 그대로인 듯 선명하다. 또 그림 자체가 그 넓은 벽과 천정을 덮고 있으면서도 우아한 멋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림들은 모두가 명화로서 벽마다 이곳저곳에 걸려있었는데, 갓 열린 포도송이처럼 그 자리에서 따 먹으면 달콤하고 신맛이 우러날 것 같은 포도 그림은 수 세기 전 그림 같지가 않았다.

독일에서의 마지막 일정으로 모차르트의 유명한 가극 ‘피가로의 결혼’을 보게 된 뮌헨 국립오페라 극장은 4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곳으로 그 옛날 왕족만을 위해 건립되었다고 한다. 전쟁 중에 극장 내부의 아름다운 조각품들을 시민들이 모두 스스로 가져다 정성껏 보관, 또는 지방에 피란시켜 두었다가 전쟁이 끝난 후 도로 그 자리에 가져다 놓아 옛날의 면모를 그대로 지닐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뮌헨 시민들의 아름다운 정성이 깃든 곳이라는 것이 나의 마음을 얼마나 벅차게 했는지 모른다. 인명이 왔다갔다 하는 전쟁 중에 공공건물의 손실을 염려하고 피란시키는 그 정성과 인정은 정말 귀하고 값진 것이 아닌가?

‘피가로의 결혼’에서 이발사인 피가로가 머슴인 케루비노를 상대로 격려조로 부르는 “이제 우리는 못 날으리”라는 유명한 아리아와 제2막의 케루비노가 백작부인을 연모하며 부르는 “그대는 아는 가, 사랑의 괴로움을”이라는 노래는 얼마나 절묘하고 아름다웠는지, 나로 하여금 또 한번 우리 한국의 수많은 음악팬들을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고국에 돌아가면 우리 꼬마들에게 ‘피가로의 결혼’이 얼마나 좋은 작품인지, 또한 피가로와 케루비노가 얼마나 멋진 성대(聲帶)로 관중을 매혹시켰으며, 또 영특한 여자 수잔나는 얼마나 요염한 음량으로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는지를 들려주리라고 마음먹었다.

◇방독일정을 마치고

이것으로 나의 방독일정은 끝난 셈이다.

금번 독일 방문은 나로서 여러 가지 느낀 점도 많았지만, 같은 전란을 겪은 나라로서의 한국과 독일을 비교해볼 때 사실 부럽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허다했다.

전쟁 직후 패전국으로서 1인당 한 달 식량의 40%밖에는 생산하지 못하던 실정에 놓여있었고, 그 외의 생산품은 열거할 가치도 없이 미미하던 독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3세대당 1대씩의 자가용과 TV를 지니고 있으며, 누구나 힘껏 노력하고 일하면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생활환경을 지닌 나라가 되었다. 이는 독일인들이 10년 먹을 것을 벌어놓지 않으면 쓰지 않는다는 정신 아래 무서운 절약과 피나는 내핍으로 이룩한 것이다. 남의 나라 것을 무조건 본받자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우리도 잘 살기 위해서 배워둬야 할 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의 방독일정이 끝나기까지 시종 곁에서 많은 수고를 해주시고 여러 모로 도와주신 주한서독대사부부를 비롯하여 그곳 의전특사로서 헤어질 때 공항에서 결별의 아쉬움을 눈물로 표현해준 홀레벤 부인, 주서독한국대사부부외 여러분들의 성의와 친절어린 협조를 깊이깊이 감사하고 싶다. 나의 방독 여행의 무사함은 모두 그분들께 힘입은 바 컸기 때문이라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 땅에서 그분들과 더불어 즐거운 재회가 있기를, 또 그때의 노고에 보답할 수 기회가 오기를 나는 진정으로 희망하며, 이 글을 맺는다.


▣박정희 대통령의 방독소감  
   - ‘박정희 대통령 방독록’(대공보부·1964)

Ⅰ.1964년 12월 6일부터 15일까지 독일연방공화국 뤼브케 대통령의 초청을 받은 나와 우리 일행은 짧은 시간이었으나, 전후 부흥된 독일의 모습을 여러 모로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었다.

실제로 독일에 체류한 시간은 독일연방공화국의 수도 본에서 3박 4일, 서베를린에서 2박 3일, 바바리아 주정부 소재지인 뮌헨에서 2박 3일뿐이었고, 여타시간은 왕복하는데 소비된 셈이다.

서독을 간단히 소개한다면, 면적은 우리 한반도의 남북한을 합친 것보다 약간 넓은 정도이고, 인구는 약 5700만 명이다. 동독의 면적은 우리 남한 정도에 인구는 약 1700만 명이다. 서독의 일인당 국민소득은 900불, 연간수출고는 약 150억불, 현재 외환보유고는 60억불이라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 독일의 전성시대는 히틀러 집권 당시라고 하는데, 전후 10년만인 1955년에 벌써 서독경제는 1935년 독일경제의 전성시대를 능가했다고 한다.

독일의 부흥상(復興相)은 과연 기적이라고 할 정도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인들은 ‘기적’이라는 말을 쓰기를 싫어하며,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후 독일국민들의 피와 땀으로 일구어진 노력의 결정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들은 이것이 사실임을 눈으로 확인했다. 오늘날 그들의 부흥과 번영은 지난 20년 동안 그들의 근면, 그들의 검소, 그들의 인내심, 그들의 단결력이 가져온 필연적인 결과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일의 도시나 농촌을 지나 다녀도 빈둥거리며 놀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거의 볼 수 없다.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이라고는 노인들, 어린 아동들, 장보러 나온 가정의 주부 정도이고, 나머지는 전부가 일터에 가서 일을 하고 있다.

서독은 5700만 명의 인구 중에서 노동력을 가진 인구가 2500만 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도 부족해서 외국노동자 약 100만 명이 서독에 와서 일하고 있으나, 그래도 노동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뤼브케 대통령을 보고 독일의 부흥상과 독일국민들의 근면성을 칭찬하였더니, 대통령이 말하기를 이제 좀 살기가 좋아지니, 배가 불러서 20년 전에 고생하던 일을 잊어가는 것이 걱정이라고 한다.

물론 오늘날 독일의 번영과 부흥을 가져온 데에는 종전 후 ‘마셜 플랜’에 의한 미국의 막대한 원조에 힘입은 점을 절대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외국의 원조를 얻어 이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근면과 내핍으로 오늘의 독일을 건설한 독일국민들을 우리는 누구보다도 많이 배우고 교훈으로 삼아야할 줄로 안다.

개인이나 국가가 그들의 자립능력이 부족할 때 남의 도움을 받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남의 도움을 받는 자는 그 도움을 받아서 하루바삐 스스로 자립하겠다는 정신이 강렬해야만, 남이 도와준 것이 참다운 도움이 되는 것이고 도와준 보람도 있는 것이다.

만일 그러한 정신이 결핍되어 있을 때에는 그들 스스로의 자립은커녕 오히려 남에게 의지하겠다는 의타심만을 조장해서 자립능력을 감퇴시키지 않을까 혼자서 곰곰이 생각도 해봤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보는 것, 듣는 것 하나하나가 오늘날 우리 국민들이 명심하고 배워야 할 점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Ⅱ. 다음으로는 독일정부와 국민들의 우리나라에 대한 관심과 한독양국의 협조에 관한 문제이다.

이미 귀국성명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번에 우리 일행을 맞이한 독일정부나 국민들은 그야말로 극진한 환대를 해주었다.

독일의 모든 언론기관도 우리 일행을 진심으로 환영한다는 기사를 연일 대서특필해 주었다. ‘동방에서 온 벗’, ‘동방에서 온 손님’, ‘분단된 나라에서 분단된 나라로’ 등등 우정에 넘치는 필치로써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독일의 조야인사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국토와 민족이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분단된 고통을 다 같이 느끼고 다 같이 슬퍼한다는 것을 이구동성으로 역설했다. 또한 그들이 우리가 운명공동체이며,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서로 무슨 일이든 도와야 된다고 진심으로 주장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나는 이와 같은 진실하고도 위대한 벗을 또 하나 가졌다는 것을 진정으로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국의 분단과 민족의 이 비극을 몽매에도 잊지 못하는 우리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해주고 동정하는 독일 민족에 대해 우리들은 혈육이 상통하는 것 같은 우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과 독일이 하나의 단일민족이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의 한국, 하나의 독일로 다시 통일되어야한다는 원칙에 합의했고, 양국의 통일은 평화적인 방법에 의해 이루어져야하며, 이를 위해서는 자유와 경제적인 번영이 선결과제라는 점에도 완전히 견해를 같이했다.

독일은 지금 그들 자신의 경제재건을 완수하고, 이제는 자유세계의 60여개 우방국가에 대해서 경제적인 원조를 제공하고 있다.

에르하르트 수상은 자유우방사이에 번영의 균형을 역설하면서, 선진 국가들은 후진성을 지닌 우방 국가들을 도와야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덧붙여 ‘문제는 원조 대상 국가들의 선택’이라고 강조했다. 이 점은 뤼브케 대통령이나 게르슈텐마이어 하원의장도 똑같은 주장을 한 것으로 나는 기억하고 있다.

이 말은 자립정신이 강하고, 스스로 돕는 자를 돕겠다는 것이 독일정부의 기본 방침이라는 뜻으로 나는 듣고 있다.

자립경제를 이룩하기 위해서 무한히 노력하고 있는 한국은 독일의 원조대상국가 중에서도 가장 관심이 많은 나라라고 하면서도, 그들이 누차 강조하는 점은 한국국내 정치정세의 안정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었다.

독일에 도착하던 첫날인 12월7일 저녁, 뤼브케 대통령부처가 주최한 만찬회가 개최되었다. 칠순의 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한국의 학생문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표시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독일에서 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일은 1919년, 즉 제1차 세계대전 바로 직후 함부르크에서 영국 군함이 독일 상선에 대해 불법적인 가해를 입혔을 때 단 한번 있었다. 이후에도 정치적인 불안정은 있었으나, 학생들이 거리에 나와서 크게 말썽을 일으킨 일이 없었다. 정치란 것은 오랜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지극히 어려운 문제인데, 하물며 학생들이 정치의 제1선에 나와서 떠드는 일이란 지극히 위험한 일이다.”

에르하르트 수상도 내가 초대한 만찬회 석상에서 뤼브케 대통령과 같은 취지의 이야기를 누누이 역설했다. 우방국가의 노정치지도자들의 진정한 충고라고 생각되어 그대로 전달하고자한다.

이에 덧붙여서 그들 독일의 지도자들은 과거의 감정에 사로잡힌 국민은 위대한 국민이 될 수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과거의 감정을 잊을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가지고, 대국적으로 미래를 내다볼 것을 역설한바 있다.

그들은 유럽의 안정이 아시아의 안정이며, 또한 아시아의 안정은 유럽의 안정임을 강조하면서, 아시아의 안정을 위해서는 인접우방국가간의 유대를 더욱 강화해야한다는 충고를 잊지 않았다. 이러한 지적은 한일관계를 비롯한 아시아 여러 우방과의 협력문제에 관하여 보다 새로운 우리의 자세를 촉구하는 바가 크다고 나는 느꼈다.

이상은 독일정부나 국민들의 우리에 대한 관심과 태도를 솔직히 전달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처럼 국토분단의 공통 비극을 지닌 그들로서는, 우리의 국내문제가 안정되고 우리가 원조를 받을 태세가 완비된다면, 모든 면에서 원조를 아끼지 않겠다는 확고한 결심이 서있었다는 것을 나는 엿볼 수 있었다.

Ⅲ. 이제 독일 경제력의 일면(一面)을 보고 느낀 점을 간단히 추려보고자 한다. 여기서 일면이라고 한 것은 짧고 바쁜 여정이었으므로, 세세히 보지 못했고 또 세밀히 보았다 하더라도 그 일부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독일 경제력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폐허가 된 잿더미 위에서 그들의 피땀 어린 노력과 인내로 전쟁이 끝난 10년 후, 즉 1955년 벌써 전쟁전의 전성시대인 1935년대의 독일경제를 능가했던 것이다.

물론 전체규모로 보아서는 독일의 경제는 미국이나 소련에 비해 아직 미흡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분단된 반쪽 국토에서 60억불이라는 외화를 보유하고, 60여 개국에 원조를 제공할 정도가 되었다는 사실, 그들의 상품이 세계 각지에서 가장 양질의 상품이요 신용 있는 상품으로서 시장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는 점들로 미루어 볼 때 오늘의 독일경제와 내일의 전망을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번 방문 기간 중 독일에서 유명한 몇 개 회사를 방문했다. 데마크, 지멘스, AEG 등 회사를 방문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지멘스 회사는 150년의 역사와 25만 명이나 되는 종업원을 가졌고, AEG 회사는 200년의 역사를 가졌다고 한다. 이들 두 회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완전히 파괴된 것을 다시 완전히 복구하였다고 한다. 특히 지멘스 회사 본사는 서베를린 시내에 자리 잡고 있고, 베를린을 복구하는데 그들이 솔선해서 협력했다는 것을 자랑하고 있었다.

조국이 있어야 회사가 있고, 민족이 있어야 회사도 필요하지 않느냐고 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의 기업인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지멘스 회사를 방문했을 때, 사장으로부터 손으로 돌리는 자그마한 전화기 모형 하나를 기념품으로 받았다. 물어본즉 150년 전 이 회사가 처음 창설될 때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문득 나는 150년 전, 1814년에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생각해보았다. 바로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유럽을 석권하던 시대였다.

그 시절에 그들 조상은 벌써 산업혁명을 하고, 이런 공장을 세우고, 각종 기계를 제작하고 있었으며, 산업의 근대화를 위해서 유럽 각국들이 서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우리 조상들은 그때 무엇을 했는가? 조선 말엽 순조왕 시대에 양반들의 싸움은 고질이 되고, 조정에는 외척의 횡포가 극심했다. 관리들은 양민의 수탈에 혈안이 되고, 공직기강이 극도로 떨어졌다. 사정이 이러하니,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고, 1811년에는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서 어지럽기 한이 없었다. 그러했으니 오늘날 우리가 유럽 각국들에게 뒤떨어지지 않을 도리가 없지 않은가?

어쨌든 우리가 그들보다 150년이나 뒤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 150년이라는 낙후된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오늘날 우리가 그들의 몇 배 노력을 더 해야 하겠거늘, 과연 우리 국민들이 그러한 각오와 노력을 하고 있는가? 나는 우리 모든 국민들이 독일의 부흥이 결코 기적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고, 일대각성을 시작해야 할 시점에 서 있다는 것을 새삼 촉구하고자 한다.

이들 회사를 방문하고 또 하나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이 어느 회사고 회사 내에 직장교육을 하는 학교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AEG 회사에서 그 교육상황을 보면, 15세부터 17~18세까지의 우리나라 초급중학교 정도를 졸업한 학생들이 3년간 교육을 받고 있었다. 이것은 완전히 숙련공을 양성하기 위한 실업교육으로서 학과보다 실습에 더욱 치중하고 있었다.

기름 묻은 작업복을 입고 선반, 산소용접기 및 절단기로 철물을 깎는 일 등 공장에서 직공들이 일하는 것과 꼭 같은 실습이다.

그들이 작업하는 책상위에는 모두 작업일지를 비치하고 있고, 하루 작업을 마치면 교육생은 작업을 한 설계도와 작업 내용을 기록하고, 하단에는 교관의 평점과 확인서명을 한다. 또 교관의 서명 옆에는 가정에 돌아가서 학부형들이 확인했다는 서명난이 있다. 그야말로 깨끗이 알뜰하게 기록돼있다. 3년간 수료를 하면 숙련공으로 합격증을 받으며, 이 증서는 국가에서 인정하기 때문에 어디든지 가서 직업을 얻어 일할 수 있다고 한다.

이 회사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양성한 숙련공만 해도 130만 명이라고 하니, 전국 각 회사에서 이같이 양성된 기술공이 얼마나 많겠는가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다.

독일인들은 전부가 일인일기(一人一技)를 가진 숙련공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그들의 공업이 발달하고, 산업이 부흥한 원인이 여기에 있다. 나는 우리나라의 교육정책의 방향을 다시 검토해야겠다는 것을 새삼 통감하게 된다.

우리나라에도 독일정부의 기술원조에 의해서 인천 인하공대 내에 직업학교가 하나있다. 독일기술자들이 와서 독일과 똑같은 교육을 하고 있다. 앞으로 우리나라에 이러한 학교가 많이 생기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나는 독일의 농촌 역시 도시 부럽지 않게 알뜰하게 꾸며져 나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독일은 전인구의 단지 8~9%만이 농사에 종사하고 있다하니 고도로 공업이 발달된 그 나라의 일면을 엿볼 수가 있다. 경작지, 목장, 임야가 확연히 구별되어 있고, 한 치의 땅도 놀리지 않고 알뜰히 가꾸고 이용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식량은 완전 자급자족이며, 채소, 육류 등 부식물은 일부 수입한다고 한다.

좁은 땅에 5700만 명이란 인구가 식량을 자급자족한다는 사실에서 그들이 얼마나 토지 이용도를 올리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볼 때 우리나라 토지도 우리가 잘 활용하면 아직도 얼마든지 이용도를 높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독일의 농촌은 중소기업과 유기적으로 관련을 맺게 하여 이를 발전시켜나가는데 주력하고 있다는 점이 특색이라고 하겠다.

농촌과 공업이 상호의존해서 함께 발전을 이룩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배워야할 좋은 점이라고 보아야하겠다.

농촌의 어디를 가나 삼림이 울창하고, 그들 국민들이 나무를 애호하는 정신을 엿볼 수 있는 것은 가장 부럽게 느낀 점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Ⅳ. 독일의 국민성은 상술한 바와 같이 근면하고, 검소하며, 또한 법질서를 존중하고, 단결심이 강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들은 또한 이론적이고, 사색적이며, 철학적이라고도 하겠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역사와 문화에 대해 높은 긍지를 갖고 있다.

기원후 9세기부터 약 1000년 동안 내려온 신성로마제국의 역사는 게르만 민족의 역사이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에게 일시적으로 유린당한 일이 있었으나, 그 후 프러시아를 주축으로 한 독일제국은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세계의 최대강국으로 등장했다.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의 전화에서 재기한 독일은 다시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음으로써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불과 10년 후에는 또다시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국가로 재등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실로 칠전팔기라는 말은 독일국민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은 독일의 힘이 어디에서 원천했을 것인가?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독일국민들의 불굴의 의지와 민족성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이와 같은 우수한 국민을 두 번이나 전쟁으로 이끌어간 당시의 지도자들을 원망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독일 사회와 경제상은 목불인견이었다고 한다. 전 생산시설은 완전히 파괴되고, 실업자와 전상군인들은 거리에 넘쳐흘렀다. 식량기근이 왔고, 여러 가지 사회적 불안이 겹쳐서 닥쳤다.

그러나 그들은 실망하지 않고 다시 재기할 것을 결심했다. 먹을 것을 먹지 않고, 입을 것을 입지 않고 비장한 결심으로 조국독일을 재건하기 위하여 또다시 단결하고 근면하고 내핍하고 건설하는데 총궐기했었다. 가정주부들은 스커트를 한 치씩 줄여서 입음으로써 천을 절약했다. 성냥 한 개비를 절약하기 위해서 세 사람이 모여야 담뱃불을 켰다.

노동자들은 자기들끼리 결속해서 독일의 경제가 부흥될 때까지 노동쟁의를 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어떤 회사에서는 경영진이 노임을 인상하겠다는 것을 노동자들이 공장이 더 건전하고 충실해질 때까지 임금인상을 하지 말아달라고 결의한 일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일들은 재건을 위한 그들의 모습의 한 단면을 소개하는 사례에 불과하다.

독일인들은 오늘과 같이 그들의 경제가 부흥되었음에도 먹는 음식은 극히 간소한 것을 취하고 있다.

이와 같이 검소한 생활을 통해서 절약한 것은 저축해서 생산과 건설에 투자한다.

또한 그들은 독일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자랑할 만한 문화재의 보호와 수리에도 많은 힘을 기울이고 있다. 본이라는 시에 있는 악성 베토벤의 주택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파괴된 것을 모든 국민들이 몹시 애석히 여기고, 베토벤이 사용하던 피아노와 기타 가구들이 소진된 것을 무엇보다도 아깝게 생각했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정부가 그 주택을 옛 모습과 똑같이 복원하였더니, 베토벤의 피아노와 가구 등 옛날 물건이 하나도 파손되거나 망실되지 않고 돌아왔다고 한다. 인근 주민들이 그것들을 전부 소개시켜 소중히 보관하다가 그대로 다시 가져왔던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씨이며, 얼마나 자기나라의 문화재를 소중히 간직하는 착한 국민들인가! 독일의 귀중한 문화재들은 대부분 이렇게 보존된다고 한다.

뮌헨에서도 옛 바바리아 왕궁이 많이 파괴된 것을 전후 수리해서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파괴된 시가의 건물들도 본래의 모습대로 정성을 다해 복원되어 뮌헨은 일찍이 번영을 자랑하던 예술의 도시 뮌헨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뮌헨은 약 2000년의 역사를 가진 고도시이며, 800년 전부터 바바리아의 수도였다고 한다.

시내 중심지대에 높은 흑색 철제의 기념비가 서있는데, 모양은 미국의 워싱턴 시에 있는 워싱턴 기념비와 비슷하나, 그보다는 훨씬 작은 흑색 기념비이다. 안내하는 바바리아 주정부 관리에게 물으니,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이 지방을 점령했을 때 세운 전승기념비라고 한다. 독일을 침략한 적장의 기념비를 무엇 때문에 남겨 두냐고 물었더니, 그는 후손들이 저 기념비를 볼 때마다 우리는 정신을 차려서 다시는 외적에게 침략을 당해서는 안 되겠다고 하는 산 교훈이 될 것이라고 답했다.

몇 년 전에 덴마크를 방문하고 귀국한 모 인사에게서도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덴마크 사람들이 과거 독일 사람들로부터 침략을 당했을 때 그 상처의 한 모습을 그대로 남겨두고 후손에게 그것을 산 교훈으로 삼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독일이 역사적으로 우리나라보다도 많은 전화를 입었음에도 수백 년씩이나 되는 유적들이 도처에 잘 보존되고 있는 것은 가장 부러운 일의 하나이다. 5,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문화민족이라고 자처하는 우리나라에 이러한 문화재들이 얼마나 남아 있고, 또 있는 그 자체의 보존 상태를 생각할 때 부끄럽기 한이 없다.

물론 문화재를 잘 보존하는 데는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국민 각자가 이것을 알뜰히 보존하겠다는 마음씨가 더욱 중요하지 않겠는가?

독일의 기후는 우리나라와 비슷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본(Bonn) 중심으로 흐르는 라인 강변에는 파란 잔디가 보이고, 강물은 1세기에 한 번 정도 밖에는 결빙하지 않는다니 우리나라보다는 약간 온화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기는 매일 안개가 두텁게 끼어서 우리나라와 같은 청명한 날씨는 매우 드물다고 한다. 이러한 대자연은 독일인들의 기질에도 영향을 미친 것 같이 느껴진다. 그들에게는 경박하고 사치한 점을 찾기 힘들다. 일반적으로 근엄하고 과묵하며 질박하고 강건한 점이라든가, 이론적이고 사색적인 그들의 기질의 특징도 그 나라의 자연적 조건에서 받은 것으로 느껴진다. 독일이 낳은 위대한 문호, 철학자, 예술가, 정치가, 군인 등 역사에서 배운 인물들을 상기해보고 독일의 대자연과 견주어 보기도 했다.

독일국민들은 또한 질서와 규율을 존중하는 좋은 습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이러한 국민성은 준법정신이라든가 사회공중도덕면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거니와 일상생활면에서도 자율성이 높다는 것이다.

나의 집안 질부 뻘되는 이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금년 봄에 신병으로 프랑크푸르트의 모 병원에 입원했다고 한다. 병실에는 나의 질녀, 독일 부인, 각기 다른 유럽 국적의 부인 2명이 입원하고 있었다. 아침에 기상을 하니, 간호사가 와서 침상에서 일어나 간단한 보건체조를 하라고 지시하고, 다른 병실에 있는 환자에게 가면서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체조를 하라고 일러 놓고 갔다.

간호사가 나가자마자 유럽 국적의 부인 2명은 침대에 누워버렸으나, 독일인 부인과 내 질녀는 간호사가 돌아올 때까지 체조를 했다. 체조를 끝낸 독일 부인은 체조를 하지 않고 침상에 누워있던 두 부인에게 왜 체조하라는 지시를 따르지 않았느냐고 언성을 높이며 대들었다는 것이다. 간호사가 보든 안 보든 체조를 하라고 했으니 해야 될 것이 아니냐, 표리가 부동하다는 데 분개를 한 모양이다. 이것은 사소한 일 같지만, 나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의 훌륭한 점의 하나라고 느꼈다.

민주주의국가의 국민일수록 이와 같은 자율성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본다.

법이 없으면 안하고, 법이 있어도 이것을 악용하거나 법망을 빠져 나가기만 하면 그만이란 사고방식이 지양되지 않고서는 진정한 민주사회가 이룩될 수 없지 않겠는가?

프랑크푸르트시 근교에는 노동자들이 저녁에 가서 술 마시며 하루의 피로를 푸는 우리나라의 대포집이나 포장마차 같은 술집이 많다. 근면하고 일밖에 모르는 그들도 저녁에는 이곳에 많이 모여와서 술이 한 잔씩 들어가면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마음껏 떠들고 밤이 늦도록 논다고 한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한 번도 그들이 서로 싸우거나 집기를 부수거나 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간혹 그곳에 있는 우리 한국 학생들이 와서 놀다가 언쟁을 하거나 술잔을 던져서 부순 일이 몇 번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혼자 쓴 웃음을 지었다.

자율과 자제, 모든 일에 한계를 분명히 한다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가 꼭 배워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Ⅴ. 두서없는 이야기가 너무 장황해지기 때문에 서베를린을 시찰한 소감 몇 마디를 쓰고 매듭을 지을까 한다.

동서베를린을 합친 인구가 330만 명, 그중 서베를린의 인구가 220만 명이다. 자유 베를린은 제2차 세계대전 전보다 더 번화해졌다고 하는데, 현대도시로서 어느 도시에 비해도 손색이 없는 훌륭하고도 거대한 도시이다. 서베를린의 연간 예산이 10억불이라고 하니, 우리나라의 1961년도 예산 3억4000만 불(한화 850억 원)에 비교하면 이 도시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공산 동독의 한 복판에 붉은 장벽으로 둘러싸인 외로운 섬과 같은 도시이지만, 오늘날 자유의 상징으로서 또한 자유세계인 마음속의 수도인 베를린을 방문한 감회는 자못 착잡했다.

동서베를린의 장벽을 따라 자동차로 달리면서 건너편의 어두운 또 하나의 세계를 바라다보며, 우리나라의 휴전선과 판문점을 연상했다.

철조망 건너 멀리 바라다 보이는 동독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휴전선 북방에 살고 있는 우리 북한 동포를 생각했다. 일행은 모두 우울한 표정들이었다. 우리를 안내하는 서베를린 시 직원들도 우리와 같은 침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철조망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로 어두운 두 개의 세계가 나뉘어져 있었다.

서베를린에는 화려한 고층건물이 즐비하게 서서 동베를린을 위압하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철조망 부근에 있는 동베를린 쪽 건물은 창문이란 창문은 전부 벽돌로 폐쇄해버리고 서쪽을 보지 못하게 해 놓은 것이 아주 대조적이었다.

이 장벽이 철거되어 모든 독일 사람들이 마음대로 다니고, 마음대로 이야기하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그날이 하루빨리 도래할 것을 진심으로 기원하면서, 그때는 우리도 그렇게 되지 않겠는가 하는 막연한 꿈을 그려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꿈이 아니고, 실현될 날이 반드시 오고 말 것이다. 또한 와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날이 빨리 오게 하기 위해서 전국민이 총력을 집중해야겠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다졌다.

서독과 자유 베를린은 그 날짜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감을 받았다. 통독을 위한 독일 국민들의 염원은 열렬하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될 수 있는 대로 표시를 적게 하고 인내하며 참고 있다. 그들은 아마 힘에 자신이 만만하기 때문일 것이다. 통일을 위한 우리의 힘을 배양하는데 우리 국민 모두가 더욱 분발할 것을 바라는 마음 간절할 뿐이다.

Ⅵ. 방독기간은 비록 짧았으나, 나와 우리 일행의 이번 기회에 느낀 점, 얻은 점은 대단히 많았다고 생각한다.

가장 큰 소득이라면 우리의 가장 성실한 벗을 또 하나 사귀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국토분단과 민족분열이라는 공동의 비극을 지닌 두 나라는 흉금을 털어놓고 서로를 쌍방을 이해하고, 고무하고, 격려하고 우의를 돈독히 함으로써 앞으로 공통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서 최대의 협조를 다짐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또 다른 소득은 국토통일이라는 지상과업을 달성하기 위해서 정부와 민간이 혼연일체가 되어 피눈물 나는 노력으로 오늘의 독일의 부흥을 가져온 그들의 재건상과 노력을 우리가 가서 직접 목격하고 배웠다는 것이다.

파산상태에 빠진 한 가정을 재건하는데도 전 가족이 일심동체가 되어 장구한 시일과 노력을 경주해야만 이룩될 수 있겠거늘 하물며 한 민족국가의 재건을 이룩하자면 전 국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피눈물 나는 노력 없이 안이한 방법으로 이룩되기를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산 교훈을 우방 독일국민들로부터 배워야할 것이다.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자기 민족을 위하는 마음이 누가 없겠는가? 문제는 조국을 어떻게 사랑하고, 민족을 어떻게 위하는가 하는 방법론일 것이다. 애국애족이란 관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언행이 일치되어야하는 것이다. 말이 없으면, 행동만이라도 있어야 애국이 되는 것이다.

독일국민들처럼 치마를 한 치 줄여서 입고, 성냥개비를 하나 절약하는 것이 위대한 애국의 실천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러한 행동은 국가의 법으로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애국하는 모든 국민이 자기 마음에서 우러나서 스스로 행동해야만 한다.

우리 대한민국 2700만 동포들의 힘을 합치면, 위대한 힘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독일의 부흥을 기적으로 보지 말고 5700만 독일국민들의 단결된 힘이, 그들의 피와 땀의 대가가 오늘의 독일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우리 동포들이 명심해주기를 다시 한 번 호소한다.

끝으로 나와 우리 일행을 따뜻하게 맞아 준 독일정부와 국민들에게 충심으로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


▲육영수 여사와 에르하르트 총리 내외
 

▲본의 마리아 임 발데 고아원을 방문한 육영수 여사
 

▲파독 광부와 간호학생들에게 연설하는 박정희 대통령
 

▲뮌헨 슐라이스하임 박물관을 찾은 박정희 대통령 내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관람하는 박정희 대통령 내외[사진=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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