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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 "획일적인 통합으로는 민주주의 구현할 수 없다"

맹인섭 기자 | 기사입력 2013/09/10 [14:57]

손학규, "획일적인 통합으로는 민주주의 구현할 수 없다"

맹인섭 기자 | 입력 : 2013/09/10 [14:57]


 
-민주주의에서 통합은 강제가 아닙니다. 독선과 강제로는 통합을 이룰 수 없습니다. 획일적 통합으로는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없습니다. 화석화된 이데올로기와 집단적 도그마를 앞세우는 분열주의 또한 민주주의의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시사코리아=맹인섭 기자]올 1월 말 출국해 현 재 독일에 연수차 체류 중인 손학규 민주당 고문이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보내는 추석명절 안부 편지글에서  "회일적인 통합으로는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없다"며 현재 국내의 정국을 의식한 듯 의미심장한 표현을 했다.
 
손학규 고문은 편지 서두에서 얼마 전에 있었던 큰형수의 장례에 참석해준 분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본의 아니게 언론에 보도되어 심려를 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기 그지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손 고문은 요즘 한창 진행되고 있는 독일의 총선 모습을 상세히 전하며 자신의 의견을 다각도로 개진했다.
 

[편지 전문]
 
안녕하십니까?
 
유난히도 더웠다는 올 여름도 이제 가을바람에 밀려가고 어느덧 추석이 다가왔습니다. 더위에 전력난까지 겹쳐 많은 고생을 하셨다는데 저 혼자 덜 더운 이곳에서 편히 지낸 것 같아 송구스럽습니다.
 
얼마 전에는 큰 형수님이 돌아가셔서 급작스레 잠시 귀국했다가 장례를 치른 뒤 곧바로 다시 독일에 돌아왔습니다. 많은 분들이 빈소를 찾아 형님과 가족을 위로해 주신데 대해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개인적으로 연락을 드리지도 못했으나 우연히 언론에 보도되어 본의 아니게 심려를 끼쳐 드려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요즘은 독일의 총선거를 재미있게 관찰하고 있습니다. 이번 선거는 대체로 메르켈 현 총리가 재집권하는 것으로 예측되면서 처음에는 열기가 별로 없었으나, 역시 선거는 선거인지라 투표일이 가까워 오면서 분위기가 달아오르는 것 같습니다.
 
여기도 역시 TV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기민당의 현 총리 메르켈(Merkel)과 사민당의 총리후보 슈타인브뤽(Steinbruck)의 양자대결 TV토론이 지난 주말에 있었는데, 그 때부터 선거 열기가 본격적으로 오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1,800만명이 시청했다고 하니까, 실제 투표할 사람의 반 이상이 TV중계를 지켜본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월드컵과 같은 빅매치를 광장에 모여 함께 보며 응원하듯이 여기서도 공동관람(Public Viewing)이라고 불리는, 카페같은 곳을 빌려 단체로 시청하며 동지적 결속을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타즈(Taz)라고 하는 진보적 일간지가 운영하는 카페에 가서 시청했는데, 약 300명이 모여서 맥주를 마시며 사민당 후보가 잘할 때는 박수를 치고 메르켈이 마음에 안 드는 말을 하면 야유를 보내면서 웃고 떠드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선거가 조용히 치러지는 이곳에서도 군중들이 집단으로 모이는 행사가 적지 않은 것 또한 인상적이었습니다. 사민당 창당 150주년 기념행사 명목의 대규모 대중 집회가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열렸는데, 저도 가 봤지만, 사민당 대변인이 30만 명이라고 주장할 정도로 많이 모였습니다.
 
지난주에는 베를린에서 약 두 시간 떨어진 핀스터발데(Finsterwalde)라고 하는, 인구 17,000명의 조그만 도시에서 열린 메르켈 총리의 연설회에도 가 봤는데, 제 눈으로 보기에도 약 3,000명의 군중이 시청 앞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정치는 역시 사람이 모여야 분위기가 사는 것 같습니다.
 
브란덴부르크 문이나 핀스터발데나, 타즈까페나 모두 잔치 분위기였습니다. 맥주잔을 들고 소세지를 씹으며 웃고 떠들고 박수치고 노래에 맞춰 몸을 흔드는 모습이, ‘정치는 평화롭고 즐겁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TV토론 이후 여론의 변화도 있었습니다. 메르켈에 비해 반토막 지지율밖에 기록하지 못하던 사민당의 슈타인브뤽 총리후보가 일부 여론조사에서 한때 메르켈을 앞서기까지 하고, 비록 일시적이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격차를 5% 이내로 추격하기도 했습니다.
 
이곳에서 선거를 지켜보면서 성숙한 민주주의가 이러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하게 됩니다. 우선 개인적인 인신공격을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선거 초반에 사민당 측에서 미국 정보원(NSA)의 독일국민에 대한 사생활 침해 가능성을 놓고 메르켈 정부를 공격하기도 했으나, 사민당이 네거티브 공격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비판 여론 속에 슬그머니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메르켈은 아예 사민당 총리후보의 이름을 한 번도 거론하지 않고 무시전략으로 나간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렇게 되니 슈타인브뤽도 공개 연설이나 TV토론, 국회 대표연설에서 메르켈에 대한 직접적인 비난을 삼가는, 우리 기준으로 보면 ‘맥 빠진’ 선거캠페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선거의 중요 쟁점은 민생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대표적 복지국가인 독일에서도 역시 임금, 연금, 보육과 세금 문제 등이 가장 중요한 이슈입니다. 사민당에서는 최저임금제 도입과 최저연금의 증액, 그리고 부자증세를 주장하고 있고, 기민당에서는 육아보조금 제도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복지국가가 고도로 완성된 나라나 이제 복지국가의 길로 들어서는 나라나 기본적인 쟁점은 똑같이 민생에 초점이 맞춰진 것을 보면서, 얼마 전 다녀온 그리스에서 살펴본 고대 민주주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아테네 직접민주주의의 현장인 아고라와 민회가 열린 프닉스 언덕에서 보듯이 민주주의는 시민의 생활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아고라는 장터입니다. 물건을 사고파는 장터에 사람들이 모여 목소리를 높이는 가운데 여론이 형성되는 곳이 바로 아고라입니다. 장터에서 일어나는 대립과 갈등을 조정하는 제도로 등장한 민회에서 시민들은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의견을 모으고, 여기서 내린 결정을 자기들이 뽑은 대표를 통해서 시행함으로써 공동체의 이익을 실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테네 민주주의의 모습입니다. 민주주의는 민생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우리는 그리스 고대 민주주의의 현장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독일의 선거와 정치를 보면서 이러한 민주주의의 원리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유럽 경제위기 속에서도 최고의 호황을 누리며 최저의 실업률을 구가하고 있는데 독일 국민이 굳이 불확실한 변화를 선택할 까닭이 없고, 이런 환경에서 메르켈의 높은 지지율은 오히려 당연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민은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정부와 지도자를 선택하는 것이고, 민주주의는 바로 이러한 과정인 것입니다.
 
지도자들의 리더십 또한 선거의 중요한 변수가 되고 있습니다. 이번 선거에서 사민당이 고전하는 이유로는 무엇보다 메르켈의 강력한 리더십이 꼽힙니다. 메르켈이 독일의 경제를 성공적으로 이끌고 유럽연합에서 독일이 확고부동한 지위를 확립한 것에 대한 높은 평가입니다. 단순한 레토릭이 아닌, 구체적인 실적에 따른 능력평가가 유권자의 가장 중요한 선택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메르켈 리더십의 핵심이 통합에 있다는 점입니다. 메르켈을 묘사하는 말 중에 “Merkel isst Alles” 라는 말이 있습니다. 메르켈은 무엇이든지 다 먹는다는 말입니다. 좋은 정책이나 정치적으로 이익이 되는 일이 있으면 모조리 자기 것으로 취한다는 뜻입니다.
 
보수정당인 기민당이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녹색당의 핵심정책인 원전폐기를 정부정책으로 확정한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메르켈은 8월 20일 나치 강제수용소였던 다하우 추모관을 방문하고 헌화했습니다. 1970년에 브란트 수상이 폴란드 바르샤바의 나치희생자 위령탑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한 사민당의 대표적 자산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메르켈은 또한 킨더겔트(Kindergeld)라고 불리는 양육보조금과, 베트로이웅스겔트(Betreungsgeld), 속칭 무터겔트(Muttergeld)라고 불리는, 직장을 갖지 않고 육아에 전념하는 여성을 위한 ‘어머니 연금제’를 도입해 가정복지정책에서도 기선을 제압하고 있습니다.
 
정당과 선거 분야에서 독일 최고의 권위자로 꼽히는 자유베를린 대학교의 니더마이어(Oskar Niedermayer) 교수를 만났더니, 사민당이 이번 총선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은 메르켈 정부의 이러한 사회통합 정책 때문에 이슈 전쟁에서 주도권을 기민당에게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메르켈의 통합정치에 이슈를 빼앗긴 사민당의 딜레마는 우리나라의 진보정치도 깊이 성찰해야 할 타산지석이 될 것입니다.
 
통합의 정치는 독일 정치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를 반대하며 출범한 초대 아데나워 정부도 사회적 시장경제를 표방하며 사회통합적 자본주의를 추구했고, 브란트 수상은 동방정책을 통해 동독과 소련을 껴안고 독일 통일의 기반을 이룩했습니다. 1949년 서독 정부 수립 이래 여덟 번의 총리가 집권하는 동안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연립정부를 통해 사회의 다양한 정치적 요구를 제도 안에 수용한 것도 독일의 통합정치였습니다.
 
이제 총선의 결과에 대해서도 관심은 ‘어느 당이 이길 것인가’ 보다도 ‘연립정부가 어떠한 조합으로 만들어질까’ 하는데 있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독일 사회가 갖고 있는 다양성이 어떠한 모습으로 표출되며 독일 정치가 이를 어떻게 포용할 것인가?’입니다. 이것은 단지 내각제와 권역별 비례대표제라고 하는 독일의 정치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다양성 속의 통합이라고 하는 독일사회의 기본가치에 관한 문제입니다.
 
통합이야말로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가장 중요한 내재적 가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국민 모두가 주인이 되어 자유롭고 평등하게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는 제도이고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에서 통합은 강제가 아닙니다. 독선과 강제로는 통합을 이룰 수 없습니다. 획일적 통합으로는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없습니다. 화석화된 이데올로기와 집단적 도그마를 앞세우는 분열주의 또한 민주주의의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민주주의의 기초는 민생입니다. 독일의 선거과정에서나 그리스의 고대 민주주의에서나 다 같이 확인할 수 있는 진리입니다.
 
민주주의 없는 번영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획일적 전제주의를 바탕으로 한 스파르타는 역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시민의 생활에 바탕을 둔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서양문명의 기초가 되어 오늘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위대성입니다.
 
독일의 선거과정을 보면서 다양성과 통합의 기초 위에 민주주의의 기본을 튼튼하게 확립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당면한 최대의 과제임을 다시 한 번 절실히 느낍니다.
 
이제 곧 추석입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고 하는 말이 우리의 매일매일의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독일 총선을 보고나서 곧 여러분 곁으로 돌아갑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 뵙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2013 한가위를 앞두고
베를린에서
 
 
손 학 규 올림
 
mis728@sisa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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